영상관법의 현상학적 이해 두번째 연재는 유식관이다.
2. 유식관
-
유식 삼성설의 3단계를 중심으로
유식이란 결국은 외계에 존재하는 사물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 외계의 대상처럼 유사하게 마음에 나타난 것을 말한
다. 이런 점에서 유식(唯識, vijñapti-mātra)이란 말은 비슷하
게 닮은 모양으로 나타난다는 의미의 ‘사현(似現)’이나 혹은
마음에 그대로 드러난다는 의미의 ‘현현(顯現)’으로 한역된
prtibhāsa란 말과 동의어이다. 이 용어는 원래는 물에 비친 달
과 같이 마음에 나타난 사물의 ‘영상’을 의미했지만, 유식학파
에서는 인식대상을 마음에 나타나게 하는 인식의 주체적인 측
면의 작용이란 의미가 사용한다.16) 그렇다보니 현현(顯現)이
란 말이나 유식(唯識)이란 말은 인식의 ‘나타남’이란 현상의
두 측면을 함축한다. 마음에 반영된 영상이나 표상[相分]의 경
우도,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적 관점[見分]도 모두 마음의 전변
에 의한 시설물이다. 이것을 『해심밀경』에서는 ‘마음이 마음
을 본다.’고 말한다.
만약 위빠사나의 삼마지에서 나타난 영상(影像)이 마
음과 다름이 없다면, 어떻게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입
니까? 그것은 마치 잘 닦인 거울과 같다. 본질[質]을 조
건으로 해서 다시 본질[本質]을 보는 것이다(以質爲緣
還見本質).(玄裝譯)17). 맑은 거울에 비유하면, 대상의 모양[境像 혹은 鏡像]을 원인으로 능히 대상의 모양을
본다(依因境像 能見境像).(菩提流支譯)18)
이것은 마음에 나타난 영상을 거울에 비유해서 설명한 부분
이다. 우리가 거울로 자신의 얼굴[本質, 因境像]을 볼 때, 이것
을 인연하여 거울에 나타난 얼굴[影像, 境像]을 본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마음에 나타난 영상을 다시 마음이 보는 것과 같
다. 이와 유사한 비유가 강물의 비유이다. 강물은 그 자체로 달
을 비추는 작용을 가진다. 그렇게 나타난 달은 강물의 달이다.
여기서 강물에 비추어진 이미지를 ‘영상(影像)’이란 용어로
표현한다. 거울에 미친 이미지란 의미로 ‘경상(鏡像)’이라고
도 한다.
여기서 본질(因境像)과 영상(境像 혹은 鏡像)의 의미를 살
펴보자. 영상으로 번역되는 pratibimba란 낱말은 반영된 이
미지(reflected image)란 의미로, 실재를 닮은 그림이나 그림
자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19). pratibimba의 어원적 의미는 ‘본
질(bimba)에 관한 것(prati)’이란 뜻이다. 거울로 얼굴을 볼
때, 거울에 비추어진 얼굴은 ‘영상(pratibimba)’이고 자기 얼
굴(bimba)은 ‘본질’이 된다.20) 여기서의 본질은 서구 철학에
서 말하는 이데아 개념과는 다르다. 여기서 본질은 영상을 만
들어내는 본래적인 사물로서, 외적인 인연을 의미한다.21) 진
제(眞諦)의 번역에서는 현장이 ‘본질(本質)’이라고 번역한 것
을 본래의 물건[‘本物’]으로 번역했다.22) 거울에 비추어진 얼
굴은 자기 얼굴이 반영된, 닮은 영상[同分影像]이다.
그런데 본질과 영상과의 관계를 보면, 본질이란 개념이 외
적인 대상의 존재를 은연중에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외적
인 존재로서의 달이 있어야 강물에 비추이고, 외적으로 얼굴
의 존재가 있어야 거울에 그 이미지가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이처럼 초기 유식학, 특히 영상문 유식설에서는 실재
론적인 경향, 인식에서 주객이원론(二元論)적인 입장도 엿보
인다.23) 하지만 우리는 확실하게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볼 수가
없다. 우리는 거울을 통해서 그것을 볼 수가 있다. 거울 속의
얼굴을 영상이라고 하고, 그 영상은 자기 얼굴을 그대로 반영
한 닮은 것으로 우리는 믿는다. 우리는 아무런 반성이 없이, 거
울에 비친 자기의 얼굴이 실제로 객관적으로 외계에 존재한다
고 자동적으로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얼굴[依他起性]은 계속적으로 변화되고 하
루에도 자꾸 변화된다. 이렇게 반성을 해보면, 유식학파에서
그것은 단지 유식, 곧 영상으로만 존재할 뿐 실제로는 존재하
지 않는다고 말한 점이 이해가 된다. 그렇지만 이런 문제는 여
전히 불교철학의 모든 학파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문제이고,
여전히 현재에 실존하는 우리들의 과제이다. 대표적으로 선종
에서는 그러면 ‘무엇이 본래의 자기 얼굴[本來面目]일까?’라
고 질문한다. 또한 이런 질문 자체가 하나의 화두이다. 간화선
자들은 화두라는 반복적인 질문을 통해서 깨달음에 나아간다
고 본다. 반면에 유식학파는 간화선처럼 ‘본질’에 대해서 곧장
가로질러가기[頓修]보다는, 마음에 타나난 특정한 ‘영상’에 초
점을 맞추어서 반복적으로 관찰하여 본질에 대한 통찰을 이루
는 점진적인[漸修] 수행방식을 선택한다.
이런 유식수행의 점진적인 과정을 『섭대승론』은 유식 삼성
설(三性說)의 3단계로 설명한다.24) 일반적으로 이것을 뱀과
새끼줄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한다. 우리가 숲길을 걷다가 새
끼줄을 밟았는데, ‘뱀이 아닌가’ 해서 놀란 경험을 했다고 하
자. 이런 경험은 일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례이다. 이
경우에 뱀의 영상은 분별성(分別性, 혹은 遍計所執性)이고,
뱀이란 표상을 만들어낸 조건으로서 새끼줄은 의타성(依他
性, 혹은 依他起性)이 된다. 마지막으로 새끼줄을 마(麻) 그
자체로 그대로 보는 것을 진실성(眞實性 혹은 圓成實性)이라
고 한다.
이런 인식의 과정을 분석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새끼줄을
보거나 밟았고, 이런 경험을 기초로 해서 뱀이라고 분별한 것
이다. 우리의 의식이 적극적으로 언어적인 개념과 함께 뱀이
라고 분별하는 까닭에 이것을 ‘두루 헤아린다(parikalpya, 遍
計).’고 말한다. 두루 헤아린다고 하는 것은 언어적인 분별과
함께 한다. 분별성은 두루 헤아림의 성격을 가진 점에서 컵이
나 꽃처럼, 보편적 성격을 가진다. 새끼줄은 분별하게 된 것,
뱀이란 영상을 나타나도록 하는 원인으로 작용한 점에서 상대
적으로 현실적 실재성을 가진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새끼줄은 ‘스스로 존재하지(svatantra) 않고 다른 조건들에 서
로 의존되어 있다(paratantra)’는 점에서 의타성이라고 한다.
위의 『해심밀경』에서 언급한 거울의 비유로 다시 설명하면,
뱀이란 새끼줄을 본질로 해서, 이 새끼줄[依他, 本質]을 의지
하여, 거울에 나타난 분별된 닮은 영상[分別, 影像]이다.
그런데 그것이 뱀이 아니라 새끼줄이라고 분명하게 자각한
다면, 이런 감정적인 혼란감에서 벗어나 안도감을 느낄 것이
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우선적으로 분별된 영상을 반복적
으로 관찰을 해야 되고, 두 번째는 ‘그 사건으로 되돌아가서’
뱀이란 영상을 만들어낸 원인이 새끼줄임을 역시 정밀하게 관
찰하여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반복적인 관찰[尋伺]25)을
통해서, 세 번째로 새끼줄이란 것도 사실은 마(麻)로서 분별된
표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새끼줄마저 어떤 문화적인 판단이나
선입견의 결과이고, 그것의 본질은 자체[麻, 끈이나 짚]로 새롭
게 통찰하게 되어 궁극적인 진실에 도달하게 된다.
이렇게 일차적으로 외적인 존재를 부정하고, 이차적으로
내적으로 분별된 영상[見分과 相分]도 부정하여, 마지막으로
존재의 진실[本性]을 드러내는 과정을 일반적으로는 ‘유식관
(唯識觀)’, 혹은 ‘유식수행(唯識修行)’이라고 한다. 그런데 유
식관의 구체적인 수행은 결국 삼마지(마음의 거울)에 나타나
는 영상을 관찰하는 작업이기 때문에26), 필자는 ‘영상관법(影
像觀法, Reflected Image Meditation)’이란 용어를 사용한
다. 영상관법의 목표는 궁극적인 본성, 본래적인 진실을 회복
한다는 것인데, 간화선과 비교하여 보면, 간화선은 중간 단계
를 무시하고 곧장 마지막 진실(너의 본래 얼굴은 무엇인가?)
에 초점을 맞춘 점에서 급진적인 수행론이다. 반면에 유식관
은 조금씩 단계별로 ‘반영된 영상 → 의타성 → 진실성’으로
반복적 관찰을 통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점에서 점진적인 길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