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마음의 세 측면
불교 명상과 심리치료의 통합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불교의 교설이 가지는 명상적인 특징을 심리치료적인 관점에서 무리 없이 이해할 수가 있으면 가장 좋겠다. 만약 이것이 여의치 않으면 심리치료적인 관점을 불교명상의 과정에 도입을 하거나, 아니면 심리치료에 불교의 명상법을 도입할 수 있으면 된다. 이들은 어느 한 방향만이 아니라, 다양한 접근과 결합방식을 시험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과연 유식의 삼성설과 유식의 실천이론이 하나의 심리치료 원리를 제공할 수가 있을까?
유식의 삼성설이 명상에 기반한 하나의 ‘명상심리치료’ 혹은 ‘명상상담’의 관점으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그 자체적으로 완결된 이론과 실천성을 담보해야 한다. 말하자면 ‘명상상담’ 혹은 ‘명상심리치료’가 넓은 의미에서 상담과 심리치료의 한 영역으로서 한 축을 담당하려면, 내담자나 혹은 환자의 번뇌와 심리적 장애에 대한 심리학적인 설명과 더불어서, 그 장애를 치료하는 원리나 기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20년 전에 비하면 많이 개선되었다곤 하지만, 불교학계는 그동안 문헌적 연구나 철학적인 연구에 몰두한 결과 성과도 있었지만, 현장에 실질적으로 필요한 연구를 소홀히 하여 왔다. 설사 불교 교설에 대한 심리학적인 접근에 대한 연구가 있다고 하여도, 대부분 구체적인 현장에서 우울증과 같은 심리적인 장애를 치료하는 방식을 증명하거나 최소한 이론적으로 그 가능성을 논증하는 연구가,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이런 현실을 반성하면서 유식불교가 심리치료의 한 영역으로 구체적으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현장연구에 강점을 가진 서구의 심리치료 이론들과의 기본적인 비교 연구를 통해서 그 가능성을 타진해 볼 필요가 있다.
1) 유식의 삼성설
유식의 삼성설(三性說)이란 인간이 근본적으로 가지는 세 가지 마음으로서,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을 가리킨다. 우리는 대체로 인간사를 이상과 현실이란 두 가지의 패러다임으로 구분하여 사유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유사하게 인간의 마음과 세계를 ‘궁극’적 진리의 측면[勝義諦, 眞諦]과 일상의 ‘세속’적인 측면[俗諦]으로 구별하는 것은 불교 중관학파이다.
유식불교의 삼성설은 이런 궁극과 세속, 진제와 속제라는 두 가지 측면[二諦]을 기반으로 하여 발전되었다는 것은 불교학계의 일반화된 견해이다. 유식 불교는 궁극의 진제(眞諦)와 번뇌의 속제(俗諦) 대립된 양자를, 상호 연결해주는 현실의 연기(緣起)로서 상호의존한다는 의타기성을 도입하여, 마음의 세 가지 타입인 삼성설 모델로 재구성한다.
현실을 그대로 진실로서 인정하면 궁극의 진리가 되고, 반대로 현실을 왜곡하여 번뇌가 되면 세속적 관점이 된다. 양자의 기본적 근거는 바로 상호의존된 연기하는 현실이다. 결과적으로 유식의 삼성설 모델은 개인이 처한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행복과 불행, 궁극과 세속을 결정한다는 이론이다. 이점은 서구의 인지행동치료 이론과 상통한 관점이다.
첫 번째, 번뇌의 ‘변계소집성(徧計所執性, pari-kalpita)’은 ‘널리 두루함’ 혹은 ‘충분함’을 의미하는 접두어 ‘pari’와 ‘생각하다’ 혹은 ‘사유하다’는 의미를 가진 ‘kalpita’의 결합이다. 현장법사는 ‘널리 두루 생각하여(徧計)’ ‘집착된 마음의 성품(所執性)’이란 의미로 ‘변계소집성’이라고 번역하였다.
변계소집성에서 핵심된 용어는 ‘집착(執着)’이다 이른바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사물을 생각하고 분별하여, 존재한다고 그것에 집착을 일으키는 마음이 바로 변계소집성이다. 집착은 고통이고 세속적인 번뇌의 삶을 지칭하는 용어가 된다.
두 번째 현실로서 ‘의타기성(依他起性, para-tantra)’은 타자를 의미하는 ‘para’와 의존하다는 의미의 ‘tantra’가 결합된 낱말이다. 어떤 사물이든지 그것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고, 모든 사물은 서로 타자에게 의존하여 생기한다. ‘연기’(緣起)란 조건(緣)으로 인하여 감정/생각이 '일어남(起)’를 의미한다. 인연을 따라서 발생한다는 의미의 연기는 그 자체로 궁극의 진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번뇌의 속성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것은 부처가 이 세상에 오기 전에도 입멸한 이후에도 존재하는 현실이다. 궁극의 부처를 보고자 한다면 연기를 봐야 한다. 연기를 보는 자는 곧 부처를 본다. 때문에 연기를 보면 궁극의 진리가 되고, 연기를 보지 못하면 그것은 곧 번뇌로서 고통의 출발점이 된다.
세 번째 궁극의 진리인 ‘원성실성(圓成實性, pari-niṣanna)’은 ‘두루함’이나 ‘완전함’을 의미하는 ‘pari’와 ‘성숙하다’ 혹은 ‘완성되다’는 의미를 가진 ‘niṣanna’가 결합된 용어이다. 현장법사의 번역에서 사용된 원성(圓成)은 부족함이 없이 편협하지 않는 인격의 원만함을 가리키고, 실성(實性)은 사물의 본질 곧 집착된 자아나 모든 현상의 본질은 공임을 의미한다.
보통 진여(眞如)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진(眞)은 거짓이 없음을 말하고 여(如)는 변함이 없는 한결같음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진실(眞實)’이다. 진실로서 진리는 저 멀리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의 연기하는, 왜곡되지 않는, 존재하는 그대로의 우리 현실이다. 이게 진실이다.
이상을 보면 유식의 삼성설 모델은 마음의 세 가지 측면을 말한다. 현실의 연기하는 의타기성을 집착하여 고통을 받는 경우가 집착의 변계소집이고, 변계소집에서 벗어나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경우가 진실한 원성실성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한마음[一心]’을 체상용(體/相/用), 세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한다. 이것은 유식의 삼성설에 상응한다. 조금 거칠긴 하지만, 변계소집성은 현실의 형상과 모양인 ‘상(相)’에 대한 집착을 말하고, 연기하는 현실의 원리를 설명하는 의타기성은 집착의 촉발원인으로서 작용[用]에, 마지막으로 진실의 원성실성은 본래의 마음 바탕으로서 ‘체(體)’에 해당된다.